PHOENIX × ASSAS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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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스플린트 2026. 5. 2. 07:30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와 몇번이나 몸을 겹치면서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건, 아이를 품을 수 없다는 사실이였다.
불사조이기에 항상 건강한 몸상태가 유지되는 나의 생식기에 문제가 있을리가 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섬의 풍습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문화권은 아이를 만들지 못하는 여자를 무시하는 풍조가 강하다.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온 걸까?

자신을 자책할까, 세상을 원망할까, 알리가 없었다.
원체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여자였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그런 신체적 특징을 이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이 아닌 건 확실했다.
손을 맞잡기도 전부터 알 수 있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외양답게 동갑인 나보다 모든 것이 능숙했다.

나를 귀찮아하는 듯이 보면서도 제대로 뒤에서는 날 이용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에 이끌린 건, 그조차도 품고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빠졌기 때문이였겠지.

사춘기 소년이라면 흔한 이야기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살이든 내장이든 내어서 탐한다. 누군가는 '풋사랑'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치기 어린'이라고 부르는 그것.

하지만 이제와서 누가 그것을 '어리석다'라고 평할 수 있으랴, 여기까지의 행적이 어쨌든 이제 그녀는 나의 것인 것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정도는, 이제와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는 나에게 등을 돌린 채 미동도 없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옆에 누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문득,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사리아, 그, 뜬금없기는 한데."
"...뭔데."
"나는 즐겁게 사는 게 좋아요이. 우리 둘 사이에 꼬맹이들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솔직히 있으나 마나 별 차이 없잖아? 나에겐 사리아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요이. 날 키워준 아버지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누군가의 뒷바라지 하는 걸 즐기는 타입은 아니라."

내 시점에선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밤이라서 약하게 켠 가스등의 탓도 있겠지.
부스럭, 천을 쥐는 소리가 나면 평소처럼 그녀가 대답한다.
무심함을 가장하는 목소리로.

"...그래."
"...무언가를 원망할 필요는 없어. 사소한 사실 하나로 자질을 의심하는 인간은 아니거든. 만약 그런 못된 놈이 있었다면, 내가 발차기로 날려줄테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그 못된 놈이 사리아의...사리아의 소중한 사람이라 해도 찰 거야. 며칠 밤낮은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신창이로 해줄까. 아예 뼈를 부러트려서, 헤헤...농담이야."

"..."
"...어떤 과거가 있었든, 모두 이곳에서 가족이 되어서 살고 있어요이. 과거를 잊으라는 소리는 안해, 다만, 새로 생긴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했으면 한다는 거야. 지금이란 건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짧은 법이거든."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런 가십거리도 안되는 말을."
"...그 좋아하는 게, 나였으면 좋겠어."

시트를 붙잡은 손을 감싼다.
어렴풋이, 희미한 짠 냄새가 올라온다.
아주 작은, 물방울이 천에 닿는 소리.

너스레 희극을 가장하면, 어스레 물들어가는 그녀가 있었다.
서로가 이해할 수 없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는 것이다.